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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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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양 축구단은 1933년 창단되어 1950-53년 한국 전쟁으로 해체된 일제강점기 평양을 연고로 한 축구 클럽이다. 1934년 전조선 축구대회 우승을 차지했으며, 경성 FC와 경평 축구 경기를 통해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일제강점기 후반 평양에서 가장 높은 순위의 클럽이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지만, 한국 전쟁으로 해체되었다. 이 팀은 경성 축구단과 함께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했으며, 박규정 선수와 같은 주요 선수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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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축구단
기본 정보
클럽 이름평양 축구단
전체 이름평양 축구단
별칭해당 없음
이전 이름평양군 (1929~1932) (공식 창단 이전)
창단 연도1933년 (무오 축구단 1918년)
해산 연도1950년~1953년 (한국 전쟁 기간)
홈구장기림리공설운동장 (현 김일성경기장)
수용 인원20,000 (증축 전)
구단주해당 없음
감독해당 없음
리그해당 없음
시즌해당 없음
순위해당 없음
유니폼 정보
홈 유니폼 (1)pattern_la1: _adidas_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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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유니폼 (2)pattern_la2: _shoulder_stripes_blue_stri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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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유니폼 (3)pattern_la3: _adidas_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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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평양 축구단은 1933년 1월 15일 평양에서 창립 회의를 거쳐 창단되었다.[1] 1934년 전조선 축구대회 결승전에서 조선 FC를 꺾고 우승하며 초창기 성공을 거두었다. 이 대회는 한국 전쟁 이전 당시 통일된 대한민국의 전국 컵 대회였다. 클럽의 홈 구장은 2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림리 경기장이었으며, 현재는 김일성경기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기장에서는 1930년대 동안 경평 축구 경기가 경성 FC와 평양 FC 간에 매년 열렸다.

1931년 이후 2년간 중단되었던 경평전이 다시 추진되어, 1933년 4월 평양축구단은 창단 직전이었던 경성축구단(당시 팀명 전경성)을 초청하여 경기를 가졌다. 이후 1935년까지 진행된 경평전에서 평양축구단은 경성축구단과 함께 강력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1935년부터 1937년까지는 매년 중국 천진으로 원정을 떠나 각각 1승 2패, 2승 1패, 3승 1패의 성적을 거두었다.[1]

평양 FC는 일제강점기 후반인 1945년까지 평양에서 가장 높은 순위의 클럽이었으며, 소련의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그러나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이어진 한국 전쟁 동안 해체되었다.[1] 이 클럽의 가장 유명한 선수로는 박규정이 있는데, 그는 이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서 뛰었으며 1954년 FIFA 월드컵 대표팀에 포함되었다.

2. 1. 창단 이전

1918년 평양 지역을 연고로 하여 창단된 무오축구단은 경성의 조선축구단과 함께 1920년대 조선 축구의 양대 축이었다. 1929년1930년 경평전이 성황리에 치러지자,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조직의 축구단 설립 요구가 높아졌다. 1932년 평양 축구계의 원로 격인 최능진(숭실전문 교수), 김광신(숭실전문 체육교사), 송석찬(태평운동구점 사장) 등이 주도하여 평양을 대표하는 축구단 창단에 뜻을 같이했다. 여기에 동경유학생축구단 감독으로 활약하다 귀국한 최용순(최일)을 끌어들여 창단 작업을 진행했다. 창단의 실무를 맡은 그는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평양부청에 취직한 뒤 유학 시절의 팀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평양축구단 창단을 지휘했다.

2. 2. 창단 (1933)

1933년 1월 15일, 평양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 총회를 열고 공식 창단을 선언했다.[2] 창단 당시 조직은 다음과 같다.[3]

직책이름
총재(단장)최정묵(변호사)
고문김건영, 이필상, 이석찬, 최능진, 정동규, 최응천, 송석찬, 차재일
전무최일(평양부청 공무원)
상담역장수부, 김성황, 손치민, 이덕인, 안기섭, 양동지, 김광신, 전기수, 오신겸, 조수증
간사박의현, 한용호, 장병오
회계한영택
서기이정식
주장이정식
선수김성간, 김영찬, 박윤기, 한영택(이상 개인사업), 안수한(미곡상), 장병오(운송업), 김신복, 박의현(이상 숭실전), 송기수, 이정식, 정용수(이상 연희전문), 박인식, 이치순(이상 보성전문), 김영근(숭실중), 윤창선(강북중), 박영철(일본체육전문)



당시 선수들은 무오축구단 및 숭실전문, 대성학교 등 평양 일대 학교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선수들이 서기, 회계 등 업무도 겸임했다. 평양의 유지 및 재력가들을 고문, 상담역으로 영입하여 재정을 튼튼히 했다. 유니폼은 청색에 ‘평’자가 새겨진 옷[4][5], 또는 영문 'P'자가 새겨진 옷[6] 이었으며, 훈련은 주로 숭실전문이나 광성중 운동장에서 했다. 평양에서 인기가 매우 높아 훈련 중에도 구경꾼이 몰려들었고, 지역 유지들이 선수들의 저녁 식사를 대접하려면 한 달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2. 3. 전성기

1931년 이후 2년간 중단되었던 경평전을 다시 추진하였다. 그 해 4월, 평양축구단은 창단 직전이었던 경성축구단(당시 팀명 전경성)을 초청하여 경기를 가졌다. 이후 1935년까지 진행된 경평전에서 평양축구단은 경성축구단과 함께 강력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다. 경평전 이외에도, 1934년 가을 전조선축구대회(현 FA컵의 전신)에서 조선 FC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등 각종 대회에서 강팀으로 군림한다. 1935년부터 1937년 3년간은 매해 중국 천진으로 원정을 떠나기도 했는데, 이 때 각각 1승 2패, 2승 1패, 3승 1패의 성적을 거두었다.[1]

2. 4. 쇠퇴와 해체

평양 축구단은 일제강점기 후반인 1945년까지 평양에서 가장 높은 순위의 클럽이었으며, 소련의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그러나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이어진 한국 전쟁 동안 해체되었다.[1] 이 클럽의 가장 유명한 선수로는 박규정이 있는데, 그는 이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서 뛰었으며 1954년 FIFA 월드컵 대표팀에 포함되었다.

3. 특징

평양축구단의 간부 및 선수들은 출신이나 활동 지역이 주로 평양 지역이었고, 꾸준히 단일화된 멤버로 출전하여 끈끈한 조직력을 과시했다. 이는 선수들의 출신 지역도 다양했고, 출신 학교에 따라 계열이 형성되기도 했으며, 같은 서울 내에서도 조선축구단과 경성축구단이라는 지역 내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경성 쪽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평양의 스타일은 1930년대 후반에 보여주었던 노쇠한 모습처럼 자신들에게 독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평양과 경성 사이 이러한 라이벌 의식은 선수의 소속에 대한 감정싸움으로 번지기까지 하였다. 1935년 경평대항축구전에서는 전년도까지 평양 소속이던 김영근에 대해, 서로가 자기 소속이라고 하여, 결국에는 출전을 못하게 된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두 팀 사이에서 소속을 바꾸어가며 활동했던 선수도 있었는데, 평양 출신 김원겸은 1929년 경성에서, 1933년 조선축구단으로, 다시 1935년에는 평양으로 소속을 바꾸었으며, 김용식의 경우 경성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1940년 평양으로, 다시 해방 후 경성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4. 경평전 (경성 FC와의 라이벌 관계)

1929년 이후 2년간 중단되었던 경평전을 평양 축구단이 창단하면서 다시 추진하였다. 1931년 4월, 평양축구단은 창단 직전이었던 경성축구단(당시 팀명 전경성)을 초청하여 경기를 가졌다. 이후 1935년까지 진행된 경평전에서 평양축구단은 경성축구단과 강력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였다.[1] 라이벌 경기는 유명했으며 경평 축구 경기라고 불렸다.[1]

5. 의미와 유산

평양축구단은 경성축구단과 함께 경평대항축구전 등을 통해 전국적인 축구 붐을 이끌었으며, 해방 이후 각기 남북 국가대표팀의 모태가 되었다. 가난한 신생 독립국에 불과하던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 및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6. 주요 선수

7. 역대 주요 성적


참조

[1] 뉴스 일류총망라로 평양축구단 총회 열고 창립 http://dna.naver.com[...] The Dong-a Ilbo 1933-01-28
[2] 뉴스 일류총망라로 평양축구단 총회 열고 창립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2011-05-29
[3] 서적 韓國蹴球百年史 라사라 1986
[4] 웹사이트 인터뷰 - 경평축구 '산 증인' 이유형옹 http://www.ohmynews.[...]
[5] 뉴스 경평양군의 접전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35-04-14
[6] 뉴스 3등열차타고 서울와 축구하던때 눈에선해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1990-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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